“사라짐은 끝이 아니다”…민병훈 개인전 ‘소멸’
· 아라리오뮤지엄서 29일 개막
· 영화감독에서 미디어영상 작가로
· 나를 눈 뜨게 한 순간' 영상·사진 전시
민병훈, 나를 눈 뜨게 한 순간 The Moment That Opened My Eyes,
“영화는 많은 것이 구속된 매체라면, 영상 작업은 자연 안에서 구속되지 않은 시나리오, 즉 즉흥곡에 가깝다”영화감독 민병훈(56)은 더 이상 서사를 밀어붙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머문다.
파도가 부서지고, 구름이 흩어지고, 무지개가 사라지는 순간 앞에서 오래 서 있다.
사라짐을 기록하지만, 그 안에서 끝내 지속을 발견한다.
아라리오뮤지엄은 오는 29일부터 4월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민병훈 개인전 ‘소멸(Dissolution)’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영화감독 민병훈이 작가로서 선보이는 다섯 번째 개인전으로, 전시 제목과 동명의 신작 영상 ‘소멸’(2025)을 최초 공개한다. 영상 4점과 사진 19점이 소개된다.
민병훈 개인전 소멸민병훈의 '소멸'은 사라짐을 말하지만, 전시는 끝내 ‘지속되는 상태’에 머문다. 파도는 부서지고, 구름은 흩어지며, 무지개는 곧 사라진다. 그러나 이 영상들에서 소멸은 종결이 아니라, 다른 형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처럼 반복된다. 작가가 말하는 ‘소멸’은 꺼짐이 아니라, 매일 소멸되고 다시 생성되는 하루의 리듬에 가깝다.
영화감독으로 출발한 민병훈은 이제 스스로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영화감독이 아니다, 작가다”라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영화와 전시 사이를 오가며, 매체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로 작업을 설명한다.
“영화는 많은 것이 구속된 매체라면, 영상 작업은 자연 안에서 구속되지 않은 시나리오, 즉 즉흥곡에 가깝다”는 말은, 그가 인물과 서사를 밀어내고 응시와 체류의 시간을 선택한 이유를 압축한다.
이번 전시에서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제주의 파도와 구름, 무지개, 그리고 사라져가는 구도심의 거리와 가옥들이 화면을 채운다.
작가는 이를 또 다른 ‘소멸의 시리즈’라고 부른다.
끊임없이 허물고 새로 짓는 풍경 속에서, 그는 왜 부수는 것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라지는 빨래터와 오래된 골목에는 여전히 생명성이 남아 있고, 그것이 자신이 기록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아내와의 사별 이후, 그는 아들과 함께 제주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상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슬픔을 말하지 않기로 한 태도는 오히려 작업을 더 차분하게 만든다.
아들은 이제 엄마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제주에 존재하는 자연의 형태와 리듬이, 아이와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과 겹쳐진다.
작가는 그것을 기억의 보존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이라고 말한다.
“달콤한 선물처럼 다시 만들어지는 느낌”이라는 표현에는, 상실 이후의 삶을 대하는 그의 거리감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이 ‘잘 찍는 자연’의 길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작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하나의 미학적 선언이다.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것을 걸러내는 일.
완성도를 낮추는 선택은, 소멸과 재생의 과정성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 상태에서만, 소멸은 과정으로 남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의 유통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영상을 제주대학교병원 로비에 기증해 상영하고 있다.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이 광고 영상 대신 제주 자연의 느린 화면 앞에 멈춰 선다.
작가는 이를 ‘치유’라는 말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지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함께 존재하는 상태”가 누군가에게 잠시 머무는 시간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작품은 소유되기보다, 필요한 곳에서 작동하길 바란다는 태도다.
OTT 플랫폼의 상영 제안을 고사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다큐멘터리 ‘약속’은 이미 영화제로 향했고, 상업적 유통의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보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이가 ‘슬픔의 이미지’로 고정되는 순간, 영화는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이 영화를 20분 분량의 영상 작업으로 재구성해 전시에 포함시켰다.
영화는 그렇게 또 하나의 매체를 넘어, 작품으로 전이된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축은 아들 시우의 시다.
장편 영상의 제목이기도 한 '나를 눈뜨게 한 순간'은 민병훈의 언어가 아니라 아이의 문장에서 출발한다.
시우는 시에서 “두려움이 녹으면 희망이 된다.
슬픔을 잊고 나면 나를 살게 한다.
엄마가 없는 세상이 내가 없는 세상과 같다는 끄덕임이 나를 살게 한다”고 썼다.
이 문장은 전시 전반을 관통하는 태도로 작동한다.
상실을 극복하거나 설명하기보다,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상태를 받아들이는 시선이다.
민병훈에게 소멸은 부활의 반대말이 아니다.
오늘 하루가 소멸되듯, 이 순간도 곧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파도처럼, 다시 생성된다.
그는 사라지는 것에 머무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사라지기 때문에 남겨야 한다.
”'소멸'은 끝을 말하는 전시가 아니라, 사라짐 이후에도 지속되는 감각과 삶의 리듬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