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추정가 147억원에 서울옥션 3월 경매에 나온 나라 요시토모의, Nothing about it, 2016 Acrylic on canvas, 194 x 162cm.
국내 미술품 경매에서 100억 원대 작품이 ‘잭팟’처럼 터졌다.
일본 거장 요시토모 나라와 쿠사마 야요이 작품이 한 경매에서 나란히 100억 원을 넘긴 것은 처음이다.
요시토모 나라의 소녀 ‘Nothing about it’(아무것도 아냐)은 150억 원에 낙찰되며 국내 경매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웠다.
31일 서울옥션 3월 기획 경매에서 이 작품은 147억 원에서 시작해 전화 응찰을 거쳐 150억 원에 낙찰됐다.
추정가는 147억~220억 원이었다.
이로써 종전 최고가였던 2025년 11월 서울옥션 이브닝 세일에서 약 94억 원에 거래된 마르크 샤갈의 ‘꽃다발(Bouquet de Fleurs)’을 크게 넘어섰다.
기존 기록을 단숨에 뛰어넘은 수치다.
2016년 작 ‘Nothing about it’은 나라 특유의 치켜뜬 눈매를 지닌 소녀가 정면을 응시하는 대형 회화(194×162㎝)로, 외부 세계의 규범에 길들지 않으려는 저항과 순수, 현대인의 근원적 고독을 상징한다.
글로벌 경매 시장에서 꾸준히 최고가를 경신해 온 나라의 대표적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경매 전부터 높은 관심을 모았다.
이어 일본 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대형 회화 ‘Pumpkin(MBOK)’은 시작가 95억 원에서 출발해 104억5000만 원에 낙찰되며 강세를 보였다.
이는 국내 쿠사마 작품 최고가이자, 이날 요시토모 나라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낙찰가다.
쿠사마의 이전 최고가는 2022년 국내 경매에서 약 44억 원에 낙찰된 ‘무한도전: 그물에 의해 지워진 비너스상’이다.
대표 연작 ‘무한 그물’ 역시 이날 20억 원에 거래되며 견조한 수요를 확인했다서울옥션 관계자는 “한국 미술품경매에서 요시토모 나라와 쿠사마 야요이 작품이 나란히 100억 원을 돌파하며 낙찰가 1, 2위를 기록했다”며 “국내 미술시장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고 밝혔다.
◆초고가 낙찰, 왜 이어지나고환율·고물가, 중동 전쟁 등으로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미술 시장은 역설적으로 강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위기일수록 자본은 가장 확실한 이름으로 몰린다”는 분석이 나온다.
달러와 금 등 전통적 안전자산의 변동성이 커진 상황에서, 검증된 미술품이 대체 투자처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블루칩 작가의 작품은 국제 정세의 혼란 속에서도 가격 하락 가능성이 낮고, 경매와 아트페어를 통해 일정 수준의 가치가 검증된다는 점에서 ‘안전자산’으로 인식된다.
이 같은 흐름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는 출품작 전량이 낙찰되는 ‘화이트 글로브 세일’을 기록하며 블루칩 작품에 대한 강한 수요를 입증했다.
소더비, 필립스 등 주요 경매에서도 초고가 작품이 잇따라 조기 매진됐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Abstraktes Bild’가 7600만홍콩달러(약 146억6000만원)에 낙찰됐고, 산유의 ‘카펫 위의 무릎 꿇은 말’은 5200만홍콩달러(약 100억3000만원)에 거래됐다.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과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역시 각각 3200만홍콩달러(약 61억8000만원), 3150만홍콩달러(약 60억8000만원)에 낙찰되며 고가 작품 중심의 거래가 이어졌다.
◆ “불안할수록 블루칩으로…안전자산 쏠림”미술시장 관계자들은 “불안할수록 블루칩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고 입을 모은다.
컬렉터는 작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이름’을 통해 불안정한 세계를 견디려는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정준모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최고의 작품은 불경기와 상관없이 제 가격을 받는다는 ‘대마불사’의 원리가 다시 확인됐다”며 “다만 이번 경매는 큰 경합 없이 낙찰된 점에서 시장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전략적 성격도 읽힌다”고 설명했다.
김영석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이사장은 “전쟁과 경기 불안 속에서 금처럼 미술품이 대체 안전자산으로 작동한 결과”라면서도 “국내 작가가 아닌 일본 유명 작가 등에 자금이 집중되는 쏠림 현상은 장기적으로 한국 미술시장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번 경매는 근현대 미술품 104점을 출품하며, 낮은 추정가 기준 약 510억 원에서 최대 750억 원 규모로 서울옥션의 기획 역량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시장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국내 미술시장이 여전히 ‘먼산 불구경’하듯 글로벌 흐름을 따라가는 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도 제기된다.
한국이 K콘텐츠를 기반으로 글로벌 위상을 높이며 ‘안전한 시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실제 거래 주체가 국내 컬렉터인지 해외 자본인지에 따라 시장의 질적 성장 여부는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미술 시장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경매 중심의 2차 시장뿐 아니라,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1차 시장의 기반 강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