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주, 무제, Acrylic on canvas, 195 x 159 cm, 2021 ⓒ 김홍주, 이미지 S2A 제공 수만 번의 선.
빠르지 않다.
서두르지도 않는다.
김홍주의 회화 앞에 서면나는 오래된 질문을 되뇐다.
그림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혹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가.
가까이 다가가면화면은 해체된다.
연필과 볼펜, 아크릴 물감.
수천 개의 선이 겹치고 스치며질감이 된다.
한 발짝 물러서면선들은 하나의 덩어리로 응결된다.
의미를 읽기 전에감각이 먼저 도착한다.
김홍주는 말한다.
자신은 그림에명확한 메시지를 담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의 화면에는설명 이전의 사고,언어 이전의 인식이 쌓여 있다.
중요한 것은‘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니라어떤 상태로 그리는가다.
이 세필의 노동은통제에서 시작해곧 수행으로 이동한다.
반복되는 선 긋기는의식을 벗어나감정과 감각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회화는 설명이 아니라도달해야 할 상태가 된다.
그의 그림에는시간이 있다.
그려두었다가한참 뒤 다시 더하고,어떤 부분은 끝내 비워둔다.
완성과 미완의 경계는의도적으로 흐려진다.
시간은 배경이 아니라재료가 된다.
김홍주는바탕 처리되지 않은 생천 위에 작업한다.
스트레처로 화면을 팽팽히 고정하는 방식도거부한다.
캔버스의 가장자리는 말려 들어가고거친 천과 물감은 직접 충돌한다.
회화를‘가상의 창’으로 만드는 장치를스스로 지운다.
남는 것은세필의 노동뿐이다.
이 반복은통제가 아니라 수행이다.
의식의 끝에서무의식의 깊이를조심스럽게 길어 올리는 행위.
이때 회화는과거도 미래도 아닌지금이라는 거룩한 순간에 머문다.
생각보다 먼저 도착하는 감각,설명보다 앞서는 떨림.
느낌은 언어 이전에,영혼이 먼저 사용하는 언어다.
오늘날 이미지는너무 빠르게 소비된다.
김홍주의 회화는이 과잉의 흐름 속에서가장 드문 미덕을 선택한다.
느리게.
끝까지 가는 행위.
김홍주의 회화는무언(無言)에 가깝다.
그러나 이 침묵은비어 있기보다는무언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상태에 가깝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화면 아래에서계속 숨을 고른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서질문은 바뀐다.
이 그림은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우리는 얼마나 오래아무 말 없이머물 수 있는가.
회화는그 시간을견딜 수 있는가를 묻는다.